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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사를 떠나 춘천시의 아래쪽에 있는


실레마을의 김유정 문학촌에 도착한것는


2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기념관으로 가서


사무국장으로 계신 고 계원님으로 부터


김유정의 문학배경을 듣는다.


 




 


김유정은 1908년 김춘식의 2남 6녀 중 일곱째,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청풍. 김육(1580∼1658)의 10대손이다.


 





아버지 김춘식은 강원도 춘천군 신남면 증리


(형 춘성군 신동면 증리)
실레 마을의 천 석을 웃도는 지주였다고 한다.


 




 



어머니 심씨는 본관이 청송으로 친정은


춘천군 동내면 학곡리(현 춘성군 신동면 학곡리)이다.
유정은 일곱 살 때(1914) 어머니를,


아홉 살 때(1916) 아버지를 여의면서
그의 인생 행로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 후 난봉과 행패를 일삼던 형 밑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아가 된 유정은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고


1919년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 입학해


1923년 졸업 후 휘문고보에 입학한다.


 





휘문고보에 진학 후 임화, 안회남 등과


친분관계를 맺고 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문학을 논하였는데 이 무렵이 그가 문학을 택하게 된


중요한 시기가 된다.


 



 


1926년 휘문고보 4학년이 되면서, 독학을 시작하여


이때 박녹주와의 연애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1930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를 중퇴하고,


 





 


형과의 재산 분배소송으로 인한 갈등과,
박녹주에 대한 실연으로 술을 닥치는 대로 마시며


방랑생활을 일삼다 늑막염에 걸리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에 고향에 야학을 열고,
금광을 전전하다 그 다음 해에


 야학을 금병의숙으로 개칭해


간이학교로 인가를 받아 운영했다.




 




 


 


같은 해 <심청>을 탈고했다. 1933년 폐결핵 진단을 받고
<연기>, <따라지>, <산골 나그네>, <소나기>를 탈고하고,


 




 


안회남의 소개로 [제일선]에 <산골 나그네>와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하였다.
1934년 <솥>, <만무방>, <애기>, <노다지>가 쓰여졌다.


 




 
그러나 본격적인 문학활동은 1935년을 기점으로 하여


1월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나기>가 1등으로 당선되고,


 




 


 중앙일보에 <노다지>가 발표되면서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한다.


 




 


김유정은 2년 동안의 작가생활을 통해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남길 만큼
그의 문학적 정열은 남달리 왕성했다.


 




 


폐결핵에 시달리던 김유정은 결국
1937년 3월 29일 매형 유세준의 집에서


사망하게 된다.




 




 


30세를 일기로 요절하기까지 불과


2년 동안의 작가생활을 통해
그가 피를 토하며 죽기 직전까지


써 남긴 글은 소설 31편,


 







 


수필 12필, 번역 2편, 편지글 5편 등


모두 50여 편에 이른다.




 




 


김유정!


 


암흑기 식민지 조국에서 고독과 실의, 병고와 실연,
파산과 가난의 일생을 마쳤던 김유정은


 






그러나 농민과 고향의 발견이라는


한국 현대 문학사의 새 장을 열었다.


 





한국의 전통적 토착어의 해학과


뿌리 뽑힌 농민의 이야기,



 






 


그리고 고향 의식의 정서를


소설의 미학으로 삼았던 그.


 




 


병약과 실연, 파산과 가난 중에서도


그의 문학에의 정열은 마치


활화산처럼 분출된다.




 




 


그러나 이 천재 작가는 안타깝게도


1937년 3월 29일
서른 살의 젊은 죽음으로 한 줌의


재로 화하여 한강에 뿌려졌다.


 


 


 

 

김 유정역에서 내려 얼마를 걸으면


그가 태어나고 자란 실례마을이 나타난다.


 


 





금병산 자락에 자리한 그의 생가는


지금 김유정 문학관으로 조성되어
요절한 천재를 기리고 있다.


 




 



김유정은 부자집 막내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고 형의 그늘에서 자랐다.
그러나 방탕한 형이 재산을


모두 날리는 바람에 어렵게 자랐다.
가난과 짝사랑과 폐병으로 얼룩진 것이


그의 짧은 삶이었다.


 


 


 



김유정은 일생 동안 두 여자를 사랑했다.
그러나 모두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짝사랑이었다.


 





연희전문을 다니던 스무 살의 어느 날,
종로거리를 가다가 막 목욕탕에서 걸어 나오는


천사 같은 한 여인을 발견하고는
넋을 잃고 무작정 그녀의 뒤를 밟았다.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 유명한 명창이자 기생이었던


연상의 여인 박록주였다.


 







 


그날부터 김유정은 박록주에게 편지를 보내고,
집을 찾아가고, 대문 밖에서 통곡을 하기도 하고,
혈서를 쓰기도 했지만 박록주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이미 명사가 된 박록주로서는
애숭이 김유정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느날 박록주는 김유정을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김유정에게 단호하고도


딱부러지게 일갈했다.


 




 


‘어찌 공부하는 도련님이


기생인 나같은 천한 여자에 빠져
앞길을 망치려 하는가.“


그리고는 김유정을 내쫓아 버렸다.


 






 


 


장안의 화제가 된 사건이었다.
 그 일로 김유정은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그 아픔을 안고서 쏟아낸 글들이


한국 근대 문학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다.
문학은 아픔의 예술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 생채기가 있었기에 김유정은


그리도 단아한 글들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김유정은 작품 여러 곳에서


첫사랑 박록주를 회상하고 있다.
‘두꺼비’와 ‘생의 반려’라는 작품이다.


 





그가 박록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의 문학관에도


박록주의 사진이 걸려있을 정도이다.


 







 


‘사랑은 아프다.


아프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아프다 못해 까맣게 타야 사랑이란다...’


 





그의 마지막 짝사랑은


시인 박용철의 누이 박봉자였다.
박봉자 역시 김유정의 사랑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김유정을 더욱 절망으로 몰아넣은 것은
박봉자와 자신의 친구이자 평론가였던


김환태와의 결혼이었다.




 




 


그 충격으로 김유정은 회복되어가던


폐결핵이 도지면서 짧은 삶을 마감했다.
1937년 3월 29일이었다.




 





그의 글은 글이 아니라 감각이었다.
언어를 감각의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


김유정의 작품들이다.


‘금병산 자락에 산새가 삐삐 웁니다.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어린 고추잠자리들이 날고 있는 가을 하늘의 새털구름이
수채화처럼 아름답습니다...’


 







그이 작품들은 대부분 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동백꽃이 그러하고 봄봄이 그러하다.
우정은 누구보다 봄을 사랑했고, 봄을 기다리던 작가였다.
봄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죽음을 2년 앞둔 1935년부터였다.
그리고 병이 위중해진 1936년은 봄을 주재로만 글을 썼다.
 가난과 질병과 고독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일종의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나타난 봄은


어느 한 구석에도 슬픈 기색이 없다.
능청스러우면서도 해학에 넘치는 주인공들을 앞세워
자신에게 씌워진 가난과 질병과 고독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의 하나였을 것이다.




 






 


여기서 해설을 중단하고


쁘띠프랑스로 향한다.


 


해설은 중학교 시절까지만 듣고


시간이 길어 중단했다


 


여기서 작품에 나오는 글을 읽고


 


 








 


 


버스를 타고 춘천호반으로 향한다


 


산지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