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사랑방
사랑방
Kakao
조회 수 149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오, 해병! 연평도!!



   반드시 이기는 군대가 있다. 그들은 패배의 불명예보다는 죽음을 택한다. 그래서 적들도 그 앞에선 기가 죽는다. 대한민국에서는 해병대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그런 군대가 있다. 꺾이거나 당하고 나면 전군의 사기가 내려앉는 군대가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 출신 기병대, 징기스칸의 네 마리 늑대가 이끄는 부대, 조선의 이순신 수군, 왜(倭)에는 가토 기요마사 부대, 히틀러와 스탈린, 모택동에게는 친위사단과 주코프 군단 그리고 임표 군단이 여기에 든다.
   상승부대의 전설은 댓가를 가리지 않는 희생과 지원의 결과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희생하는 정신과 그들을 위해 퍼붓는 아낌없는 지원이 상승의 전통을 낳는다. 이번 연평도에서 해병은 지원을 잃었다. 휴가 떠나려 부두에 나왔던 서정우 해병은 포격이 시작되자 배에 오르는 대신 부대로 뛰었다. 그리고 전사했다. 희생만 있었다.
   나는 해병이다. 국회에 진출한 해병이다. 대한민국은 통일이 될 때까지가 건국기라고 믿는 국회에 진출한 해병이다.
   연평도 포격소식은 지역구인 대구에서 받았다. KBS가 보낸 문자메시지였다. 설익은 뉴스라 주변 동지들에게는 말하지 않고 일정을 취소한 채 곧 바로 KTX를 탔다.
   객실천장에 매달린 액정화면에 대통령의 지시가 떴다. 『확전이 되지 않도록 상황을 잘 관리하라』. 믿을 수가 없어서 몇 군데 전화로 확인했다. 어금니를 물었다. 곧 전사 1명이라는 자막이 떴다. 그 이후 화면은 보지 않기로 했다.
   연평도는 내 자식 놈이 복무했던 곳이다. 나는 130기이고 아들은 706기다. 『높은 놈』 자식은 제일 힘든 곳에 보내는 해병대 전통에 따라 배치된 것이다. 당시 나는 3선 의원이었으니까 어김없이 『높은 놈』이었다.
   집사람은 두 번 면회를 다녀왔다. 나도 가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들도 원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 곳 지휘관들에게 신경 쓰이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들이 복무했던 곳에서 아들의 후배 그리고 나의 후배가 전사한 것이다. 생각해봤다. 해병대는 절대로 공매를 맞지 않는다. 반드시 반격하고 반드시 몇 배로 갚는다. 그러나 확전되지 않도록 상황을 잘 관리하면서 어떻게 되갚는단 말인가.
   아들의 말이 떠올랐다. 40명 남짓의 두 개 부대가 방어진지 구축공사와 연병장 공사를 1년도 안 걸려 완성했다고 했다. 2만평이 넘는 연병장 공사는 아들이 속했던 부대가, 1만 개가 넘는 폐타이어를 쓴 진지구축공사는 다른 부대가 맡았다고 했다. 그때 아들은 해병대는 야전삽과 곡괭이만으로도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우리끼리의 숙어로  설명했었다.
  - 전사한 해병은 그 폐타이어 진지에서 당했을까 -
  서울역에서 여의도 국회로 가면서 TV뉴스를 봤다. 대통령의 지시내용이 조금 바뀌어 있었다. 요컨대 단호하게 대응하되 확전은 피하라는 요지였다. 군대, 특히 해병대는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군통수권자의 명령은 더더구나다.
 - 앞뒤가 뒤틀린 이 어려운 명령을 해병은 어떻게 수행했을까 -
   연평도는 51년 7월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던 이봉춘 대위(당시)가 박갑철 견습사관의 1개 소대를 보내면서부터 해병대 진지가 되었다. 훨씬 북쪽의 백령도는 그보다 6개월 전 신채휴 상사가 이끄는 1백 명 남짓의 해병이 둥지를 틀었다. 둘 다 북한의 목줄에 해당하는 곳이다.
   TV뉴스는 불길과 연기로 뒤덮인 연평도를 거의 붙박이 배경화면처럼 사용하면서 계속되고 있었다. 화면만으로도 민간인을 포함한 무차별 포격임이 분명했다. 퍼뜩 머리를 스쳤다. 희생자들 가운데는 이제는 노인이 되어있을 박갑철 소대장이 거두었던 고아들도 있지 않을까. 박소대장은 성육원이라는 고아원을 짓고 80명의 전쟁고아를 먹이고 입히고 키웠으니까.
   한나라당 의원총회가 시작되었다. 모두들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나 낙차(落差), 그렇다 낙차가 가슴 가득히 느껴졌다. 슬기로운 발언이 가끔 나올 때면 그 낙차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커졌다.
  - 정직하게 내 마음을 쏟아낼까 -
  참았다. 6선 의원은 의총에서 말하는 걸 참아야한다는 전통 때문에서가 아니라 나의 분노가 해병이기 때문에 비롯된 게 아닌가를 묻고 묻고 되묻기 위해서 참았다.
  식당 TV에 새로운 소식이 떠있었다. 해병이 K9자주포 80여발로 반격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2백여발을 맞고 80여발로 갚았다? 이건 해병대의 방식이 아니지 않은가. 갖고 있던 포탄이 그 뿐이었을까?
   강한 군대는 두 가지 요소로 만들어진다. 장비와 용기다. 알렉산더시절이나 걸프전의 슈워츠코프 때나 이것은 철칙이다. 2백발 얻어맞고 80발을 쐈다면 해병대에게는 두 가지 이유 밖에 없다. 80발이 가진 전부였거나 더 이상 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졌거나. 분노가 화산이 되었다. 금방 떡국이 체했다.
  아들놈이 말한 적이 있었다. 연평도 에서는 6.25때 쓰던 탱크를 반쯤 땅에 묻어서 대포만 사용하고 있다고. 백령도 해병부대를 방문했을 때 그곳역시 같은 사정임을 확인했다. 부대장은 해병 특유의 자신만만한 말만 했지만 곁에 사람이 없자 『할 수만 있으면 포병장비만이라도 보강하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귓속말을 했다.
   이 부탁은 얼마 후 들어줬다. 야당원내총무를 하면서 정부 여당이 차일피일 미루는 이라크파병을 내가 앞장서서 지원하면서였다. 국방장관에게 두 가지 부탁을 했다. 내가 앞장선 이상 여당이 위험하다고 망설이는 그곳에서 한달간 사병들과 함께 복무하게해줄 것과, 만약의 경우 제일 먼저 공격받을 서해5도에 대포를 포함한 최신 장비를 보강해줄 것, 이두가지였다.
   첫 번째 부탁은 장관 이하 간부들이『감격』하면서 수락했으나 결국 날아갔다. 나중에는 자비로 갈테니까 주선하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탄핵주범에게 그런 주선을 할 수도 없었겠으나 그 때 주고받은 편지는 지금도 내 책상 서랍에 있다. 가끔 실없는 친구들이 국방부 승인 없이는 입국자체가 불가능했던 당시의 사정을 모르는 체 하면서 시비를 걸어왔으나 입으로만 용감한 그런 부류들을 상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 부탁, 서해5도의 장비개선은 들어줬노라고 했다.  탄핵 후폭풍으로 낭인이 된 처지여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조장관은 그런 일에 허언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한데 지금은 포탄이 80발 밖에 없다?
   해병대가 강했던 건 명예를 존중하는 용기 외에 미해병대와 똑같은 장비를 지급받은 요인도 있었다. 나의 해병시절기본화기는 M1이었다. 다른 군은 칼빈이었다. 미해병대와 마찬가지로 자동기관총은 소대마다 기본장비였다.
   장비에 대한 열정은 모든 강군의 전통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무적이라던 다께다 가츠요리의 기마부대를 격파한 것은 1만 자루의 화승총 수집 덕분이었고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의 승패를 가른 것은 주코프의 T34 신형전차 대량비축 덕분이 아닌가.
   신현준 초대사령관때부터 해병대는 최신장비 욕구의 화신이었다. 50년말 부산 용두산에 천막사령부를 차렸을 때  미해병대가 건축자재를 보내려고 했지만 거절하고 그 대신 더 많은 최신무기를 요구했을 정도다. 직접 들은 이야기다.
   용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명령에 대한 복종에서 우러난 용기가 그 첫 번째다. 「군인은 적 보다 상관을 더 무서워할 때 용감해진다」는 주코프의 명언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두 번째 원천은 다르다. 명예와 자부심이다. 한니발의 군대나 롬멜과 페턴의 전차군단 그리고 해병대가 여기에 속한다. 공정식사령관의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부하가 십자포화 속을 뚫고 돌격하기에 앞서 공정식소령(당시)에게 말한다.『너무 무섭다』고. 공정식부대장이 선두에 서면서 말한다. 『사실은 나도 무섭다. 그래서 계속 혼자말을 하는거다. 나는 해병대다 나는 해병대다』.
  - 서정우해병이 배를 타는 대신 부대로 달려간 것은 명령이 아니라 명예를 지키려는 마음에서였음을 나는 안다 -
   체한 떡국을 달래려고 활명수를 마셨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분노의 화산이 그래로 임을 느꼈다.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해병이 당했다. 군의 사기란 시소와 같은 법인데 누구도 이런 걱정을 안한단 말인가.
   의원총회 직전에 있는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입을 열기로 마음먹었다. 단어를 골라봤다. 국회의원 하는 동안 야당대변인만도 두 차례나 했지만 험한 말을 쓴 기억은 별로 없는 나다. 최고수위의 발언이라야 5공시절 『태어나서는 안 될 정권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충격을 주기로 했다. 대통령주변에서 대통령의 귀를 장악하고 있는 청와대와 정부내의 인사들을 정조준해서 말하자. 손때묻은 사람을 좀체로 바꾸지 않는 대통령의 성정에 비추어 이들을 뒤흔들지 않고는 변화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우리시절 해병대에서는 『개자식』이 최대의 모욕이었다. 그래서 상관이 아무리 화가 나도 이 말 만은 쓰지 않았다. 그들이 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내가 아는 최대의 모욕적인 호칭을 쓰자.
   그리고 현재의 대북정책을 전면적으로 리뷰하자는 나의 평소 지론은 완전 생략하기로 했다. 국지전도 전쟁이고 전쟁이 붙은 이상 이기는 얘기 외의 것은 소용이 없으니까.
   그날 회의에서 나는 정확하게 준비된 첫머리의 말을 뱉었다. 『북한 포격직후 대통령으로 하여금 확전되지 않도록 상황을 잘 관리하라고 말씀하게 한 청와대와 정부내 개자식들에 대해 한 말씀드리겠다.』
   이 글은 나에게 정면으로 욕먹은 사람들이 꼭 읽어주기를 바라며 썼음을 덧붙인다.

 

※ 본 기고문은 북한의 연평도 도발 직후 주간조선 2133호(2010.11.29)에 게재한 글입니다.

( 2010년 11월 30일 11시 39분   조회: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