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9월 함경남도 금야군의 기차역에 보위부 요원들이 호송해온 한 군관가족이 내렸다.
대위출신의 남편과 아내 그리고 열 살 안팎의 두 딸,
네 사람은 기차에서 내린 후 보위부 요원들의 지시대로 곧추 역전 여관으로 들어갔다.
몇 시간 후 여관에서 그 군관 가족 네 명은 자살해죽었다.
남편이 칼로 두 딸과 아내를 먼저 찔러 죽이고 마지막에 자신의 배를 칼로 갈랐다고 했다.
그들이 묵었던 방 턱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본 사람들과 보위부 요원들이 달려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일가족 모두가 시체로 변한 후였다.
네 사람이 쓰러진 방바닥에 피가 즐퍽히 흐르는 것을 본 보위부 요원들도 기겁해서 도망쳐 나왔다.
이것은 필자가 어린 시절에 봤던 광경인데 그들은 요덕수용소로 잡혀가던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지옥의 땅인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서 짐승으로 살기보다 차라리 죽어버리리라 결심하고 자살을 택했던 것이다.
1979년까지 함경남도 금야군 역전 여관은 요덕 정치범수용소로 들어가는 관문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금야군 역전 여관을 거쳐 수용소로 끌려갔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눈물이 고인 원한의 여관, 눈물의 여관이였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 1980년부터는 함경남도 고원군 관평리 역전을 통과해 들어가고는 했다.
지금도 함경남도 고원군 관평리 역 앞에는 요덕수용소 ‘출장소’가 있다.
이제는 그곳이 요덕수용소로 가는 관문이다.
아마 북한에 ‘인권만세!’의 함성이 터지는 날, 눈물의 수용소 관문들에는 비명에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는 비문이 새겨질 것이다.
탈북자 진선락
대위출신의 남편과 아내 그리고 열 살 안팎의 두 딸,
네 사람은 기차에서 내린 후 보위부 요원들의 지시대로 곧추 역전 여관으로 들어갔다.
몇 시간 후 여관에서 그 군관 가족 네 명은 자살해죽었다.
남편이 칼로 두 딸과 아내를 먼저 찔러 죽이고 마지막에 자신의 배를 칼로 갈랐다고 했다.
그들이 묵었던 방 턱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본 사람들과 보위부 요원들이 달려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일가족 모두가 시체로 변한 후였다.
네 사람이 쓰러진 방바닥에 피가 즐퍽히 흐르는 것을 본 보위부 요원들도 기겁해서 도망쳐 나왔다.
이것은 필자가 어린 시절에 봤던 광경인데 그들은 요덕수용소로 잡혀가던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지옥의 땅인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서 짐승으로 살기보다 차라리 죽어버리리라 결심하고 자살을 택했던 것이다.
1979년까지 함경남도 금야군 역전 여관은 요덕 정치범수용소로 들어가는 관문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금야군 역전 여관을 거쳐 수용소로 끌려갔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눈물이 고인 원한의 여관, 눈물의 여관이였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 1980년부터는 함경남도 고원군 관평리 역전을 통과해 들어가고는 했다.
지금도 함경남도 고원군 관평리 역 앞에는 요덕수용소 ‘출장소’가 있다.
이제는 그곳이 요덕수용소로 가는 관문이다.
아마 북한에 ‘인권만세!’의 함성이 터지는 날, 눈물의 수용소 관문들에는 비명에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는 비문이 새겨질 것이다.
탈북자 진선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