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麗州)에서
5/25/2016 (수)
짙은 안개인지 아무튼 잔뜩 흐린 날 아침, 여주 (麗州)의 조상님들 산소를 들러 보고 근처 가평의 잣나무들도 구경하자고 나섰다.
그동안 열흘도 넘게 매일 연속이던 동창들과의 모임도 다 끝나고, 식구들과의 모임이 시작 되었을때 어딜 보고 싶으냐고 막내 동생 경한이 물었다.
나는 여주의 부모님 산소를 가보자고 했다.
나이 칠십이 넘어 이제사 철이 좀 들은건지 그동안 여러번 서울 왔어도 한번 들러볼 생각도 나지 않던 그곳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경한 부부, 언니, 나 그리고 병한까지 다섯이 아침 8시반쯤 언니네 아파트 앞에서 만나 경한이 차로 떠났다.
한국은 땅이 워낙 작아서 어디던 지루하게 가는 법이 없다.
게다가 형제들이 오랫만에 만나 이얘기 저얘기 잠간 하다보니 어느새 중간 목적지, 휴계소에 다 왔다.
여긴 길 다니는 재미의 절반이 휴계소 들러 주전부리 하는 것, 이젠 나도 그런 속내를 잘 알아 아침을 안 먹고 집에서 나왔다.
하긴 8시 반에 만나기로 하고보니 먹을 시간도 없었다.
어느 휴계소인지, 난 이름도 모르는 곳에 들렀는데 커다란 건물안에는 사람도 거의 없고 그냥 휑덩그레했다.
주중이라 그런건지 아님 흐린 날씨때문인지 아무튼 손님이 없어 썰렁했다.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곳이 음식 맛이 더 좋을것 같은데 여긴 전혀 아니다. 하지만 We have no choice.
날씨도 그렇고, 따끈한 국물 생각이 나서 새우 튀김 우동과 어묵 우동을 놓고 한참 고민했다.
나는 이렇게 식당에 와서 우동을 먹어보는 기회가 거의 없으니까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한참 생각타가 어묵 우동을 시켰는데 무슨 어묵을 그렇게나 많이 주는건지???
꼬치에 낀 어묵이 그릇에 가득한데 너무 많아 다 먹을수가 없고, 맛도 모르겠다.
많이 기대했던 우동에 좀 실망해서 대강 끝내고 나와 근처의 커피점으로 들어갔다.
흐린 봄날 아침, 숲이 있는 바깥 쪽 테이불에 나와 앉아 즐기는 호도 과자와 달콤한 카푸치노는 그냥 황홀했다.
다시 차를 타고 달려 곧 여주 산소에 닿았다.
맨 아래쪽, 들어가는 입구에 작은 할아버지 산소, 그리고 그옆에 우리 엄마와 아버지의 산소가 있다.
그 언덕 윗쪽으로 올라가면서 한번 뵙지도 못한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 할아버지, 할머니, 고조 할아버지, 할머니 등, 대대로 조상님들의 산소가 있다.
아버지는 은퇴후 지금 내 나이쯤 되셨을때 문중 어른들과 의논하시면서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조상님들 산소를 이쪽으로 다 모셔왔다.
그러나 이 묘지는 엄마, 아버지 대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더 이상 땅도 안 남았고, 아마 우리 대 부터는 새로운 장례법을, 아니 새로운 장례 문화를 따를거라 생각하신것 같다.
아버지는 당신이 조상님들 묘를 이장하면서 많이 깨달으신 것이 있어 우리에게 신신 당부를 하셨다.
당신, 그리고 엄마는 꼭 화장을 해서 이 자리에 같이 묻어 달라고 하셨다.
그리고 몇년후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우리가 아버지 뜻을 따르려했을때 문중에서 이견(異見)이 나왔다.
자리가 없으면 모를까 거기 자리가 있는데 왜 굳이 화장을 먼저 잡숴서 산소를 쓰려고 하느냐는 거다.
우린 아버지의 심중을 십분 이해하니까 절대로 화장을 해야한다고 고집 세웠다.
화장을 해서 깔끔하게 처리한후 산소를 쓰면 후에 또 이장을 하는 일이 생긴다해도 훨씬 쉽고 자손들에게 폐가 안될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 아버지가 가신후 불과 5년이나 되었을까 할때 옆에 벌써 무슨 Outlet이 있는 커다란 Shopping Center 가 생겼고, 큰 길도 새로 났다고 했다.
여주의 우리 부모님 산소
나는 지금껏 산소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작 나의 부모님 산소에 이렇게 와서 보니 그 느낌은 너무나 달랐다.
화장 잡숫고, 뼈가루만 묻쳐있을뿐인데도 마치 엄마, 아버지가 정말로 거기 계시는 것 같았다.
두분 때문에 옛날에 살던 집을 다시 찾아 온것 같은 느낌이였다.
엄마, 아버지는 꿈속 같이 어디로 다 사라져버리셨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여기와 계셨던 것이다.
아니, 두분의 아주 티끌만한 생(生)의 흔적이 여기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 이렇게 와 계신지도 벌써 이십여년 되어 가는데 지금껏 서울엘 와도 한번 찾아뵐 생각을 않은 것이 너무 후회가 되고, 죄송했다.
여러 조상님들 곁에 계신다해도 풀도 잘 가꾸지 않은 그 초라한 산소가 너무나 쓸쓸해 보여 눈물이 핑 돌았다.
서울에 남아 큰 효자 노릇하는 막내, 경한이 맨땅에 엎드려 절을 하는데 난 돌아서서 눈물을 닦고 사진만 자꾸 찍었다.
아버지가 쓰신, 우리 가족 역사를 담은 묘비.
"次女 新玉은 晋州人 鄭奉吉 에게 出家하여 俊鎬, 健鎬의 二男을 낳았으며...."
나는 이런 집안 역사가 여기 써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버지는 참... 이런게 유교식인지는 몰라도 괜히 좀 거북하다.
일본에 잠간 가있었기에 일어와 한자를 조금 아는 다니엘에게 '二男' 이 무슨 뜻인지 물었다.
"Two boys" of course.
후유, 다행이다. 하지만 앤디는 모른다. 한참 설명을 해줘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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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 (英陵)과 영릉 (寧陵)
우리집 산소를 둘러본후 근처의 영릉으로 갔다.
이제보니 윗사진 오른쪽 맨 아래, 작게 써있는 두 영릉이 무슨 소린지 잘 알지 못했다. 시간도 없고, 형제들이 이끄는대로 그냥 영릉 (英陵)만 보고 왔다.
능을 보기전에 우선 세종전이라는 작은 박물관부터 들렀다.
훈민정음 언해본 (訓民正音 諺解本)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일세, 꽃 좋고 열매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믐에 아니 그칠세, 내(川)를 이뤄 바다에 이르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믐에 아니 그칠세, 내(川)를 이뤄 바다에 이르나니..."
나는 옛날 언문으로 쓴 이 말들이 너무 재밌다. 용비어천가를 한번 다 읽어 보았으면 좋겠다.
여러가지 발명하고 만들어 내느라 바쁜 사람들 (설명문 찍어 오는걸 잊었음)
해시계
시간없다고 다들 바삐 보고 나가는걸 이런 옛날 발명품들이 너무 예뻐서 사진만 급히 찍어 가지고 나왔다.
영릉(英陵) 앞의 건물 (齋室)
세종대왕 동상
훈민문(訓民門)
훈민문(訓民門)으로 들어서자마자 왼쪽에 연못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연못에는 잉어같은 커다란 색색갈이 Fish가 그득했다.
무심코 "아유, 여기 fish 많네." 했더니
"그래, 물반 고기반."
언니가 시침 뚝 떼고 받아 넘기는데 깜짝 놀랐다.
그땐 하도 놀라서 웃지도 않았다.
하지만 갈수록 그 한국 사람들 유머가 너무, 너무 우습다. 아무리 고기가 많기로서니 '물반 고기반' 까지야 되겠어?
식당 메뉴에 별라별것 다 있다고 "여러가지 하네." 등등.
언니는 새로 유행하는 그런 웃기는 말들은 죄다 챙겼다가 내가 가면 보란듯이 쓴다.
서울 올때마다 언니 때문에 새로운 유머를 얻어 듣는데 사실 그 한국 특유의 정서가 담긴 해학을 나만큼 즐기고 이해하는 사람도 없다.
나중까지 두고 두고 생각하며 혼자 웃는다.
제사, 차례, 성묘 음식 준비하는 수랏간
이 드넓은 英陵 (내 생각엔 영특한 임금님의 묘라는 뜻)이 우리가 몽땅 세낸 것처럼 다른 방문객 하나 없어 고요했다.
바야흐로 새봄을 맞아 풀은 파랗고 나무도 푸르고, 앞이 탁트인 경치가 적막 속에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어디서 예쁜 뻐꾸기 소리가 들렸다.
능으로 올라가는 계단
이름 모를 예쁜 꽃
난초같은 꽃을 찾아 무척 반가웠는데 애석하게도 좀 시들었다.
능을 떠나면서, 다시 '물반 고기반'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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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의 '들풀'이라는 맛집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구운 닭고기 조그만것 서너점 빼고는 식당 이름처럼 말짱 풀 뿐인데 깔끔한 현대식 상차림으로 그냥 괜찮았다.
다들 건강식을 찾는 세상이라 이 집도 소문이 난것 같았다.
가평에는 하늘을 찌를듯 키도 크고 옆으로도 우람하게 큰 나무들이 산을 가렸다.
산에 나무 없다고 난리치던 그 옛날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가평을 보고 감탄했다.
논길, 밭길 지나 집에 돌아오는데 여기저기 찐빵 파는 가게가 보였다.
'안흥'인지 '안성'인지, 찐빵이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여긴 '가평 찐빵'인가 보다.
찐빵집이 어떻게 이런 시골에 다 모여있냐고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서울 언니네 아파트까지 다 왔다.
경한네랑 언니에게 덕분에 오늘 잘 놀았다고 치하하고 막 헤어지고 났는데 갑자기 그 찐빵 생각이 간절했다.
마침 언니네 아파트 건너편에 시장이 있으니 거기 가서 하나 사가지고 들어가자고 병한이를 졸랐다.
그애로서는 애 서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찐빵 찾는 내가 너무 기가 막히지만 안갈수도 없는 일.
둘이 부지런히 길 건너 시장으로 갔다.
건물안에 재래식 시장같이 보이는 이곳엔 각종 떡들, 오징어 튀김, 반찬 종류까지 별라별 음식이 다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가 찾는 찐빵은 거기 없었다.
없다고 하니까 너무나 화딱지가 났다. 시골에도 쌔고 쌨던데 왜 서울 한복판인 여긴 그 잘난 찐빵이 없는거냐 말이다.
그저 찐빵 생각만 났다. 거기있는 수수전병 같은 귀한 주전부리도 다 귀찮았다.
며칠후 하나로에 가서 원 풀어 커다란 찐빵을 두개 샀다.
병한이 저쪽으로 가서 이것저것 반찬거리 장보고 있는 사이에 혼자 앉아 두개를 다 먹어 치웠다.
그제야 속이 후련했다.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한국의 찐빵 가게가 왜 시골에만 그렇게 모여 있어야 하는 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아마 나 같은 멍청이 속을 썩이려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가평의 들꽃
'용비어천가' 가사가 너무 좋지요?
찐빵이야기도 재미있고...
우리에겐 '망배'라는 편리한 유머도 있습니다.